미국의 시리아 내전 개입은 불가피한가?

미국의 시리아 개입은 불가피한가?

시리아 내전 문제에 대한 찬반 토론이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찬성하는 파는 주로 인도적인 문제에 대해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는 반면에 반대하는 파는 시리아의 주권을 존중해 집안 일은 알아서 해결하게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딜레마가 그리 쉽게 풀어질 이슈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역사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에 대한 예제를 들어 보려 합니다.

미국은 명실상부한 패권 국가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영제국의 몰락과 함께 소련의 강력한 라이벌로 부상했고, 1991년 소련이 붕괴함과 동시에 확고한 세계 1위의 슈퍼파워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미국은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국제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물론 멋모르고 나섰다가 깨진 사례도 많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랙 호크 다운>의 배경이 된 1993년 소말리아 분쟁도 그렇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이라크 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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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호크 다운> 최고의 명장면들 중 하나였던 리틀버드의 착륙장면입니다. 힘차게 내린 용감한 병사들 중에는 지휘부의 실수에 희생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물론 미국 정부도 바보는 아니니 쓸데 없는 일을 굳이 벌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저 멀리 아프리카나 중동까지 가서 누굴 때려 부수려고 할까요?

답은 바로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일 것입니다. ‘팍스 아메리카나’라고 조소적으로 사람들이 부르는 이 시대는 미국이 중재하는 세계입니다. 이게 시리아 내전이랑 정확히 무슨 관련이 있느냐 하면, 미국의 주적을 생각해보면 되겠습니다. 미국이 생각하는 명실상부한 주적을 꼽자면 이란과 북한일 텐데요, 이들은 핵무장으로 미국과 다른 강대국들의 염통을 쫄깃하게 하는 효과를 보여준 바 있습니다. 만약 미국이 자신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시리아 사태로 보여주지 않는다면 이란과 북한은 ‘어, 쟤네는 그 난리를 쳐도 미국이 가만히 있네?’ 하고 더 많이 국제 평화를 방해하는 쪽으로 갈 것입니다. 결국 팍스 아메리카나를 망칠 불씨를 당기게 되는 것이고, 미국은 그 불길을 조기에 진압해야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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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미국의 자부심이 된 항모전단. 항모전단 하나에 소속된 육해공 전력이 한 나라의 전체 전력과 맞먹는 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런 걸 11개나 굴리고 있으니…)

그럼 이제 미국 이전에 세계의 패권을 거머 쥐었던 나라의 사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의 로마 제국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혼돈의 도가니 였습니다. 원로원에 의해 폭군이자 ‘국가의 적’으로 규정된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고, 오현제 중 첫 번째로 평가받는 네르바가 제위에 올라있었습니다. 66세에 제위에 오른 네르바는 긴급히 게르마니아(로마인들이 게르마니아라고 이름만 붙이고 사실 진짜 게르마니아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속주 총독 트라야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포합니다. 이리하여 2년 후 네르바가 사망했을 때 트라야누스는 별 반대 없이 제위에 순탄히 오를 수 있었습니다. 4년 만에 황제가 3명이나 바뀐 셈인데요, 여기서 트라야누스는 로마의 황금기를 열 재목이었음을 극명히 보여줍니다. 먼저 그는 바로 로마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게르마니아 지역 방위군 사령관으로서 국경 밖의 게르만 족이 로마의 정치 혼란을 눈여겨 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로마 제국의 방위 전략은 주로 공격적인 방어였습니다. 말하자면 적이 공격 준비를 하고 있는 낌새를 보이면 먼저 쳐들어가 깡그리 박살내고 나온다는 것이었죠. 이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상비군 체제가 완벽히 준비되어 있어야 했고, 로마 후기로 가며 주둔군 위주가 아닌 기동군 위주로 체제가 재편성되며 전성기 때의 전략은 더 힘들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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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상남자 트라야누스 황제 흉상입니다. 공공의 실질강건이 뭔지 보여준 멋있는 황제이지요.)

그러나 게르마니아를 직접 대대적으로 공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미 선대 황제들 중 아우구스투스가 너무나도 잘 알려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거하게 말아먹은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이후로도 로마인들은 ‘게르만 족’ 하면 치를 떨었습니다. 로마 제국 전기에 천재적으로 가장 강한 황권을 휘둘렀다고 알려진 아우구스투스가 두번 다시 시도해보지 못했던 일을 갓 즉위한 트라야누스가 시도하기에는 무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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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 광경입니다. 로마 장군이었던 푸블리우스 바루스는 로마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게르만인 아르미니우스에 속아 넘어가 이 전투에서 원정군 전체 3개 군단 2만 여 명을 모두 사지에 몰아넣게 됩니다. 이 전투의 여파로 로마는 게르만 전역을 아예 포기하게 되죠.)

그래서 트라야누스는 생각했습니다. 게르마니아 대신에 우리 주위에 어느 한 놈을 붙잡아 족치면  게르마니아도 당분간은 조용해지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게르마니아에서의 전쟁에 있어서 로마군이 걱정했던 것은 전투력이 아니라 지형이었거든요. 평원에서의 싸움에는 로마군을 이길 자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게르마니아는 숲이 많고 땅이 넓어서 로마라는 하나의 국가 전체가 제대로 크게 일을 벌이지 않고 쉬엄쉬엄하다가는 그대로 밀려버리는 특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트라야누스에게는 다행히도, 때마침 로마에 도전하는 지역이 나타났습니다. 그건 바로 현재의 루마니아에 해당하는 발칸반도 북쪽의 다키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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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빨강으로 칠해진 지역이 바로 다키아입니다.)

사실 로마 제국과 다키아 사이의 분쟁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가 즉위하고 나서부터는 이미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 때부터 로마와 충돌하고 있었고, 또 한 번은 로마 장군 푸스쿠스가 다키아 원정길에 올랐다가 마르코만니 족에게 대패해 전사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 원정의 참패로 말미암아 로마는 배상금을 지불하고 군사고문을 파견하는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됩니다.

이미 뛰어난 군사적인 재능을 인정받고 있던 트라야누스에게 다키아만큼 먹음직스런 지역도 없었을 것입니다. 먼저 게르마니아 및 방위선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고, 또 네르바의 후계자로서 군사적인 대대적 승리를 거머쥐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야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데케발루스에게는 불행하게도, 다키아에는 당시 대량의 금광과 은광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로써 다키아는 트라야누스에게 있어서 군사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좋은 답이 된 것입니다. 트라야누스는 원로원의 승인을 받기 위해 1년 후로 로마로 돌아갑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제스처 였는데, 왜냐하면 황제가 이제는 유명무실해진 기관인 원로원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것을 보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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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원로원의 상상도입니다. 역대 로마 황제를 평가할 때 중요한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는 것이 그 황제와 원로원 사이의 관계이니 만큼 이는 매우 중요한 제스쳐 였습니다.)

이리하여 기원후 101년, 트라야누스는 다키아를 멸망시키기로 마음먹고 대군을 이끌고 진군합니다. 안타깝게도, 다키아 전쟁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이 소실되어 정확한 수치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는 것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트라야누스 원기둥일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림만으로 설명하니 전쟁에 대한 정확한 단계와 진행은 알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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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 원기둥입니다. 창과 방패 등 무구는 구리로 표현했었다고 하는군요. ‘했었’다고 하는 이유는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구리를 모두 뜯어갔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정보 전달은 힘들지만, 양각된 사람들의 모습은 정교한 예술 작품으로는 손색이 없습니다.)

몇 가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로마군이 매우 승승장구했다는 것, 그리고 기원후 102년 경에는 다키아의 수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북쪽 지방으로 쫓겨난 다키아인들은 게릴라전을 계속했습니다. 로마의 주둔군의 피해가 심해지자 트라야누스는 이제 아예 다키아를 지도 상에서 지워버릴 결심을 했고, 106년에 다키아는 완전히 멸망해 275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포기할 때 까지 로마의 속주가 됩니다. 데케발루스는 어떻게 됐냐고요? 106년 로마군의 포위공격 끝에 이 다키아 왕은 자결하게 됩니다.

고대사적인 관점에 있어서 로마가 비교적 자비로웠던 것은 바로 점령 후 약탈의 정도가 다른 문명보다는 적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키아 전쟁은 칭기즈 칸이 천 년이나 앞당겨진 것 마냥 철저한 초토화 작업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모든 다키아 부족민들은 추방당하거나 살해되었지요. 이러한 강경책을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른 나라들에게, 이 경우에는 게르마니아에, 로마가 아직 건재함을 보여주려는 계기가 뒷받침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팍스 로마나’를 증명한 셈이 된 것입니다.

현재 시리아 내전과 미국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시리아라는 하나의 지역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주적인 이란과 북한, 더 나아가 러시아와 중국에 미국 주도의 질서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려면 실력행사가 불가피한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금 음모론적으로 들어가자면, 밑도끝도 없겠지만, 미국이 외교적으로 궁지에 몰린 듯한 생각도 드는 군요. 개입을 하자니 러시아가 시리아 정부군을 지원한다고 하고, 개입을 안 하자니 미국의 자존심과 패권이 흔들릴 상황이니 말입니다. 만약 제 3자나 미국의 적대 세력이 이를 꾸몄다면 정말 제대로 된 외통수일 수도 있겠습니다. 현재 미국은 당시의 로마와는 물론 다릅니다. 로마와 달리 국제적인 눈치도 봐야하고, 또 계속된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도 개입으로 매꿀 수가 없습니다. 모쪼록 평화적인 방법으로 범죄자들에게는 책임을 물어 엄중히 처벌하는 결과가 나타나면 합니다.

전 제 블로그에서 어떠한 정치적 입장을 피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전 그저 사회 현상을 보고 이에 걸맞는 역사적인 사례를 예로 들어 독자 분들의 이해를 도우려는 것입니다. 제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깨달을 수 있도록 돕고, 또 역사는 얼마든지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냥 가볍게 ‘아 이런 사례가 과거에도 있었구나!’ 하고 머리 속에 넣어 가시면 되시겠습니다.

사진 출처:

http://www.military-art.com

wikimedia.org/wikipedia/commons

http://www.historynotes.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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