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독립을 향한 길(3)

지난 글에서는 남부와 북부 식민지의 독특한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나머지 중부식민지 네 곳을 알아보려 하는데요, 바로 뉴욕,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 그리고 뉴저지입니다. 이들을 마지막으로 13식민지 소개는 끝마치고, 본격적으로 미 독립전쟁의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용을 너무 질질 끄는 것 같아 독자 분들께 정말 죄송합니다. 여기서 설명할 것이 나중에 생길 마찰들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미합중국: 독립을 향한 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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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식민지 네 군데의 위치와 지도입니다. 친숙한 이름들이 많이 보이죠?)

먼저 뉴욕부터 알아보겠습니다. 뉴욕은 특이하게도 영국이 아닌 네덜란드에 의해 시작된 식민지였습니다. 그 이유인 즉슨, 북미식민지 건립이 한창이던 17세기가 바로 네덜란드의 전성기였거든요.  네덜란드는 당시 스페인으로부터 80년 간의 전쟁 끝에 1648년 독립해 유럽열강의 반열에 들어섰습니다. 그 이후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동남아와 남미에 진출했고 전세계의 경제를 주름잡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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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네덜란드 제국의 리즈시절 당시 강역. 네덜란드는 이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식민지를 동서로 쪼개어 동인도, 서인도 회사에게 각각 관리를 맡깁니다. 영국의 유명한 동인도 무역회사가 바로 이걸 모방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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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오늘날의 백악관과 같은 위상을 가졌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위풍당당한 관저. 그러나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오래가지 않았으니…)

유럽은 굉장히 특이한 전통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잘 나가는 놈은 패고 본다는 것이죠. 네덜란드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철천지 원수였던 영국과 프랑스는 네덜란드를 잡기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합쳐 네덜란드를 공격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란전쟁인데요, 이 네 번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네덜란드는 짧았던 황금기를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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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네덜란드 함대는 세 번이나 영국과 프랑스라는 양대 강국의 공격을 튕겨냈습니다. 문제는 네 번째 였는데, 당시 프랑스의 왕이 바로 그 유명한 태양왕 루이 14세였죠. 장기전으로 돌입하면 애초에 게임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뉴욕은 네덜란드의 전성기의 일환으로 세워진 식민지였습니다. 원래 이름도 뉴욕(New York)이 아닌 뉴 암스테르담(New Amsterdam/Nieuw Amsterdam)이었죠. 헨리 허드슨이라는 영국 탐험가가, 훗날 허드슨 강이라고 불려질 강으로 타고 항해하며 현재 뉴욕의 맨해튼 섬 인근을 네덜란드 땅이라고 선포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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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영국인이 뉴욕을 네덜란드 영토라고 선포했냐고요? 왜냐하면 허드슨의 스폰서가 바로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스페인이 스폰서한 제노바 탐험가였습니다. )

무역 제국이라는 말에 걸맞게 뉴 암스테르담은 정말 다양한 국가와 인종들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는 바로 영국과 달리 네덜란드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의 기록에 따르면 항구에서는 18가지 언어가 들렸다고 합니다.

영란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영국은 마음 놓고 뉴 암스테르담을 침공헀습니다. 당시 수비대장 페터 스튜이바상(Peter Stuyvesant)은 무력충돌 직전에 침공군 사령관이었던 요크 공작에게 항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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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하러 가는 스튜이바상. 스튜이바상은 지금에 델라웨어에 세워진 스웨덴의 식민지 뉴 스웨덴을 정복한 용맹한 장수였지만 본격적인 영국의 침공을 소수의 수비병력으로 막기는 어렵다고 판단, 항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크 공작은 그 식민지를 자신의 영국 영지의 이름을 따 뉴욕이라고 이름붙였습니다. 그 지역에 살던 스웨덴 인들과 네덜란드 인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몰아낼 수는 없었죠. 따라서 뉴욕을 위시한 중부식민지들은 북부나 남부와 다르게 다양한 인종과 신앙을 처음부터 인정한 셈이 되었습니다. 지명만 봐도 알 수 있는게, 할렘(Harlem), 브룩클린(Brooklyn), 헬게이트(Hell Gateㅋㅋㅋ) 등등은 각각 네덜란드 지명 Haarlem, Breuckelen, Hellegat에서 왔습니다. 어쨌거나 뉴욕은 이후 맨해튼 섬과 룬 섬의 항만 시설, 그리고 비옥한 농토로 번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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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2009년과 1609년의 맨해튼 섬입니다. 네덜란드 인들이 원주민 부족에게 60길더, 당시의 24달러를 주고 샀다는 이 섬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이 되었습니다. 만약 제게 타임머신이 있다면 당장 가서 1달러만 보탤텐데 말입니다.)

약간 남쪽의 귀여운 식민지 델라웨어(Delaware) 또한 네덜란드의 영토로 시작했습니다. 1631년 츠바넨다엘 식민지를 위시한 사유지들이 들어섰는데, 한 가지 특이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바로 남부의 연한 노동자들을 연상시키는 ‘후원자 제도(네덜란드어로 patroonship)’입니다. 한 후원자가 북미 대륙으로 50명 이상의 인원을 수송시킬 능력이 된다면 150에이커의 토지를 받는 제도였죠. 이로 인해 많은 노동자들이 북미대륙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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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처럼 영국에게 점령당한 후 델라웨어는 곧 이야기하게 될 펜실베이니아에 흡수됩니다. 1701년에는 독립된 의회와 법률을 허락받게 되지만 여전히 펜실베이니아와 같은 지사를 모십니다. 일종의 동군연합이랄까요.)

또 하나의 네덜란드 식민지는 바로 뉴저지입니다. 오늘날의 뉴저지 영토는 사실 뉴 스웨덴과 뉴 암스테르담이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델라웨어처럼 영국의 손에 넘어간 뉴저지는 캐롤라이나 처럼 두 명의 영주에 의해 동서로 쪼개졌다가 다시 결합됩니다. 다른 중부식민지들과 마찬가지로 뉴저지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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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강을 따라 나있는 분홍색 지역이 뉴 네덜란드이고, 남쪽의 연보라색 지역이 뉴 스웨덴입니다.)

다음은 평화로운 식민지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입니다. 펜실베이니아는 이름에서 보이듯이 1681년 윌리엄 펜 주니어(William Penn Jr.)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펜 가문은 당시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들 중 하나였는데, 얼마나 돈이 많았냐하면 당시 국왕 찰스 2세가 윌리엄 펜 주니어의 아버지 윌리엄 펜 시니어에게 빚을 지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한 마디로 나라 전체가 한 가문에 빚을 지고 있었던 거죠.

당시는 명예혁명 직전의 혼란기라 국고에 돈이 얼마 없었고, 또 윌리엄 펜 시니어도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기에 이 부채는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이 빚 이야기는 윌리엄 펜 시니어가 죽고, 아들 윌리엄 펜 주니어가 퀘이커 교도로 개종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영국에서 탄압받던 퀘이커 교를 보던 윌리엄 펜은 신대륙으로 떠나기로 결심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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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자 친한 친구였던 찰스 2세에게 칙령을 건네받는 윌리엄 펜. 윌리엄 펜은 영국 정부가 지고 있는 빚을 탕감해 줄테니 칙령과 땅을 신대륙에서 보장하라는 딜을 제시합니다.)

처음 펜실베이니아에 도착했을 때 윌리엄 펜은 그 곳을 뉴 웨일스(New Wales)라고 이름붙인 후 라틴어로 ‘숲’을 뜻하는 실바니아(Sylvania)로 고쳤습니다. 하지만 곧 찰스 2세가 편지를 보내 ‘너도 결국에는 너네 아빠 빽 덕분에 간 거잖아? 이름은 너네 아빠를 기리기 위해 펜 실바니아(Penn Sylvania)로 바꿔. 안 그럼 내가 칙령 취소할 거임.‘이라고 밀어붙이자 그는 펜실베이니아로 다시 한번 이름을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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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아일랜드에게 허가된 찰스 2세의 칙령(Charter)입니다. 당시 식민지 건설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칙령이었는데, 이건 바로 본국이 그 식민지를 자신의 관할로 인정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외국이나 원주민 부족의 침략을 받았을 때 본국의 지원과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일종의 보험이었습니다.)

펜실베이니아가 다른 식민지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원주민 부족들과 아주 원만한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 있겠습니다. 먼저 윌리엄 펜은 원주민 부족들로부터 땅을 ‘구매’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아주 희한한 방법으로 비춰졌는데, 그 이유는 바로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은 땅을 빼앗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러한 오만한 태도는 당연히 식민지들과 원주민들의 충돌로 귀결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정당하게 땅을 매입한 펜실베이니아 사람들에 대한 원주민들의 태도는 한층 누그러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바로 순한 기질이었죠. 이들은 교리 상 싸움을 혐오하는 평화주의자들이었고, 이에 따라 군에 입대하지 않으려는 태도도 이들이 영국에서 탄압받았던 이유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유순한 태도는 신대륙에서 아주 잘 먹히는 전략이었죠. 현재 뉴욕에 있는 태머니 홀(Tammany Hall)의 기원이 된 원주민 추장 태머니를 비롯한 다른 추장들이 펜실베이니아를 아주 좋아했던 것도 상냥한 태도 덕분이었습니다. 얼마나 사이가 좋았냐면 인디언 영역 한복판을 이주민 아녀자가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었고, 또 그 반대도 가능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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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원주민들과 협정을 맺는 펜실베이니아의 관계자들. 안타깝게도 이런 따뜻한 관계는 1700년 이후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불 같은 성미의 이민자들이 대규모로 들어오며 끝나게 됩니다.)

펜실베이니아에는 퀘이커의 자유롭고 온화한 분위기와 종교의 자유 덕분에 많은 이주민들이 몰려들었고, 후에 미국의 첫번째 수도가 될 필라델피아가 건설되었죠. 또한 펜실베이니아에는 천연자원이 풍부해서 강철 제강산업과 농업이 번성했습니다.

중부식민지는 여러 의미에서 매우 축복받은 식민지였습니다. 맨해튼 섬을 비롯해 천혜의 항만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고, 땅도 북부보다는 비옥해 밀 생산을 중심으로 한 농업이 발달했죠. 종교의 자유와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해 많은 이주민들이 몰려들어와 번영을 구가한 건 물론입니다. 훗날 독립전쟁 동안에도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아주 중요한 요충지로 생각되었고, 결합을 위한 움직임이 이들 중부식민지에서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답니다.

이로써 첫 13식민지들이 모두 설립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세워진 곳은 버지니아였고 가장 나중에 세워진 곳은 조지아였습니다. 북부는 대부분 종교적인 이유로 만들어진 반면에 남부는 경제적인 이유로 세워졌습니다. 중부는 둘이 짬뽕된 경우였죠. 이들 식민지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18세기 경이 되면 250만에 육박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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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본국과의 친밀감에 있어서는 중부와 남부 식민지가 북부보다는 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훗날 독립전쟁 때 중요한 요소가 되지요.)

이렇게 연재 세 번째 글을 마쳤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 글부터는 마침내 모든 것의 시작 7년 전쟁과 프렌치-인디언 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channel.nationalgeographic.com

traditioninacti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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