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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독립을 향한 길(3)

지난 글에서는 남부와 북부 식민지의 독특한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나머지 중부식민지 네 곳을 알아보려 하는데요, 바로 뉴욕,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 그리고 뉴저지입니다. 이들을 마지막으로 13식민지 소개는 끝마치고, 본격적으로 미 독립전쟁의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용을 너무 질질 끄는 것 같아 독자 분들께 정말 죄송합니다. 여기서 설명할 것이 나중에 생길 마찰들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미합중국: 독립을 향한 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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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식민지 네 군데의 위치와 지도입니다. 친숙한 이름들이 많이 보이죠?)

먼저 뉴욕부터 알아보겠습니다. 뉴욕은 특이하게도 영국이 아닌 네덜란드에 의해 시작된 식민지였습니다. 그 이유인 즉슨, 북미식민지 건립이 한창이던 17세기가 바로 네덜란드의 전성기였거든요.  네덜란드는 당시 스페인으로부터 80년 간의 전쟁 끝에 1648년 독립해 유럽열강의 반열에 들어섰습니다. 그 이후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동남아와 남미에 진출했고 전세계의 경제를 주름잡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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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네덜란드 제국의 리즈시절 당시 강역. 네덜란드는 이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식민지를 동서로 쪼개어 동인도, 서인도 회사에게 각각 관리를 맡깁니다. 영국의 유명한 동인도 무역회사가 바로 이걸 모방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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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오늘날의 백악관과 같은 위상을 가졌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위풍당당한 관저. 그러나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오래가지 않았으니…)

유럽은 굉장히 특이한 전통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잘 나가는 놈은 패고 본다는 것이죠. 네덜란드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철천지 원수였던 영국과 프랑스는 네덜란드를 잡기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합쳐 네덜란드를 공격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란전쟁인데요, 이 네 번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네덜란드는 짧았던 황금기를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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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네덜란드 함대는 세 번이나 영국과 프랑스라는 양대 강국의 공격을 튕겨냈습니다. 문제는 네 번째 였는데, 당시 프랑스의 왕이 바로 그 유명한 태양왕 루이 14세였죠. 장기전으로 돌입하면 애초에 게임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뉴욕은 네덜란드의 전성기의 일환으로 세워진 식민지였습니다. 원래 이름도 뉴욕(New York)이 아닌 뉴 암스테르담(New Amsterdam/Nieuw Amsterdam)이었죠. 헨리 허드슨이라는 영국 탐험가가, 훗날 허드슨 강이라고 불려질 강으로 타고 항해하며 현재 뉴욕의 맨해튼 섬 인근을 네덜란드 땅이라고 선포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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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영국인이 뉴욕을 네덜란드 영토라고 선포했냐고요? 왜냐하면 허드슨의 스폰서가 바로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스페인이 스폰서한 제노바 탐험가였습니다. )

무역 제국이라는 말에 걸맞게 뉴 암스테르담은 정말 다양한 국가와 인종들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는 바로 영국과 달리 네덜란드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의 기록에 따르면 항구에서는 18가지 언어가 들렸다고 합니다.

영란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영국은 마음 놓고 뉴 암스테르담을 침공헀습니다. 당시 수비대장 페터 스튜이바상(Peter Stuyvesant)은 무력충돌 직전에 침공군 사령관이었던 요크 공작에게 항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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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하러 가는 스튜이바상. 스튜이바상은 지금에 델라웨어에 세워진 스웨덴의 식민지 뉴 스웨덴을 정복한 용맹한 장수였지만 본격적인 영국의 침공을 소수의 수비병력으로 막기는 어렵다고 판단, 항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크 공작은 그 식민지를 자신의 영국 영지의 이름을 따 뉴욕이라고 이름붙였습니다. 그 지역에 살던 스웨덴 인들과 네덜란드 인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몰아낼 수는 없었죠. 따라서 뉴욕을 위시한 중부식민지들은 북부나 남부와 다르게 다양한 인종과 신앙을 처음부터 인정한 셈이 되었습니다. 지명만 봐도 알 수 있는게, 할렘(Harlem), 브룩클린(Brooklyn), 헬게이트(Hell Gateㅋㅋㅋ) 등등은 각각 네덜란드 지명 Haarlem, Breuckelen, Hellegat에서 왔습니다. 어쨌거나 뉴욕은 이후 맨해튼 섬과 룬 섬의 항만 시설, 그리고 비옥한 농토로 번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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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2009년과 1609년의 맨해튼 섬입니다. 네덜란드 인들이 원주민 부족에게 60길더, 당시의 24달러를 주고 샀다는 이 섬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이 되었습니다. 만약 제게 타임머신이 있다면 당장 가서 1달러만 보탤텐데 말입니다.)

약간 남쪽의 귀여운 식민지 델라웨어(Delaware) 또한 네덜란드의 영토로 시작했습니다. 1631년 츠바넨다엘 식민지를 위시한 사유지들이 들어섰는데, 한 가지 특이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바로 남부의 연한 노동자들을 연상시키는 ‘후원자 제도(네덜란드어로 patroonship)’입니다. 한 후원자가 북미 대륙으로 50명 이상의 인원을 수송시킬 능력이 된다면 150에이커의 토지를 받는 제도였죠. 이로 인해 많은 노동자들이 북미대륙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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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처럼 영국에게 점령당한 후 델라웨어는 곧 이야기하게 될 펜실베이니아에 흡수됩니다. 1701년에는 독립된 의회와 법률을 허락받게 되지만 여전히 펜실베이니아와 같은 지사를 모십니다. 일종의 동군연합이랄까요.)

또 하나의 네덜란드 식민지는 바로 뉴저지입니다. 오늘날의 뉴저지 영토는 사실 뉴 스웨덴과 뉴 암스테르담이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델라웨어처럼 영국의 손에 넘어간 뉴저지는 캐롤라이나 처럼 두 명의 영주에 의해 동서로 쪼개졌다가 다시 결합됩니다. 다른 중부식민지들과 마찬가지로 뉴저지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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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강을 따라 나있는 분홍색 지역이 뉴 네덜란드이고, 남쪽의 연보라색 지역이 뉴 스웨덴입니다.)

다음은 평화로운 식민지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입니다. 펜실베이니아는 이름에서 보이듯이 1681년 윌리엄 펜 주니어(William Penn Jr.)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펜 가문은 당시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들 중 하나였는데, 얼마나 돈이 많았냐하면 당시 국왕 찰스 2세가 윌리엄 펜 주니어의 아버지 윌리엄 펜 시니어에게 빚을 지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한 마디로 나라 전체가 한 가문에 빚을 지고 있었던 거죠.

당시는 명예혁명 직전의 혼란기라 국고에 돈이 얼마 없었고, 또 윌리엄 펜 시니어도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기에 이 부채는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이 빚 이야기는 윌리엄 펜 시니어가 죽고, 아들 윌리엄 펜 주니어가 퀘이커 교도로 개종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영국에서 탄압받던 퀘이커 교를 보던 윌리엄 펜은 신대륙으로 떠나기로 결심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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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자 친한 친구였던 찰스 2세에게 칙령을 건네받는 윌리엄 펜. 윌리엄 펜은 영국 정부가 지고 있는 빚을 탕감해 줄테니 칙령과 땅을 신대륙에서 보장하라는 딜을 제시합니다.)

처음 펜실베이니아에 도착했을 때 윌리엄 펜은 그 곳을 뉴 웨일스(New Wales)라고 이름붙인 후 라틴어로 ‘숲’을 뜻하는 실바니아(Sylvania)로 고쳤습니다. 하지만 곧 찰스 2세가 편지를 보내 ‘너도 결국에는 너네 아빠 빽 덕분에 간 거잖아? 이름은 너네 아빠를 기리기 위해 펜 실바니아(Penn Sylvania)로 바꿔. 안 그럼 내가 칙령 취소할 거임.‘이라고 밀어붙이자 그는 펜실베이니아로 다시 한번 이름을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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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아일랜드에게 허가된 찰스 2세의 칙령(Charter)입니다. 당시 식민지 건설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칙령이었는데, 이건 바로 본국이 그 식민지를 자신의 관할로 인정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외국이나 원주민 부족의 침략을 받았을 때 본국의 지원과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일종의 보험이었습니다.)

펜실베이니아가 다른 식민지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원주민 부족들과 아주 원만한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 있겠습니다. 먼저 윌리엄 펜은 원주민 부족들로부터 땅을 ‘구매’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아주 희한한 방법으로 비춰졌는데, 그 이유는 바로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은 땅을 빼앗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러한 오만한 태도는 당연히 식민지들과 원주민들의 충돌로 귀결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정당하게 땅을 매입한 펜실베이니아 사람들에 대한 원주민들의 태도는 한층 누그러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바로 순한 기질이었죠. 이들은 교리 상 싸움을 혐오하는 평화주의자들이었고, 이에 따라 군에 입대하지 않으려는 태도도 이들이 영국에서 탄압받았던 이유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유순한 태도는 신대륙에서 아주 잘 먹히는 전략이었죠. 현재 뉴욕에 있는 태머니 홀(Tammany Hall)의 기원이 된 원주민 추장 태머니를 비롯한 다른 추장들이 펜실베이니아를 아주 좋아했던 것도 상냥한 태도 덕분이었습니다. 얼마나 사이가 좋았냐면 인디언 영역 한복판을 이주민 아녀자가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었고, 또 그 반대도 가능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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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원주민들과 협정을 맺는 펜실베이니아의 관계자들. 안타깝게도 이런 따뜻한 관계는 1700년 이후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불 같은 성미의 이민자들이 대규모로 들어오며 끝나게 됩니다.)

펜실베이니아에는 퀘이커의 자유롭고 온화한 분위기와 종교의 자유 덕분에 많은 이주민들이 몰려들었고, 후에 미국의 첫번째 수도가 될 필라델피아가 건설되었죠. 또한 펜실베이니아에는 천연자원이 풍부해서 강철 제강산업과 농업이 번성했습니다.

중부식민지는 여러 의미에서 매우 축복받은 식민지였습니다. 맨해튼 섬을 비롯해 천혜의 항만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고, 땅도 북부보다는 비옥해 밀 생산을 중심으로 한 농업이 발달했죠. 종교의 자유와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해 많은 이주민들이 몰려들어와 번영을 구가한 건 물론입니다. 훗날 독립전쟁 동안에도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아주 중요한 요충지로 생각되었고, 결합을 위한 움직임이 이들 중부식민지에서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답니다.

이로써 첫 13식민지들이 모두 설립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세워진 곳은 버지니아였고 가장 나중에 세워진 곳은 조지아였습니다. 북부는 대부분 종교적인 이유로 만들어진 반면에 남부는 경제적인 이유로 세워졌습니다. 중부는 둘이 짬뽕된 경우였죠. 이들 식민지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18세기 경이 되면 250만에 육박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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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본국과의 친밀감에 있어서는 중부와 남부 식민지가 북부보다는 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훗날 독립전쟁 때 중요한 요소가 되지요.)

이렇게 연재 세 번째 글을 마쳤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 글부터는 마침내 모든 것의 시작 7년 전쟁과 프렌치-인디언 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channel.nationalgeographic.com

traditioninaction.org

미합중국: 독립을 향한 길(2)

지난 글에서는 식민지 개척의 배경과 최초의 북미 식민지 제임스타운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잃어버린 식민지 로어노크의 이야기도 했지요.

오늘은 이에 이어 남부식민지 나머지와 독특한 기원을 가진 북부식민지들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조금은 지루하실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독립을 결심하는 때가 오면 왜 각 식민지들이 그런 행동을 취했는지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합중국: 독립을 향한 길(2)

먼저 버지니아 주위의 남부 식민지부터 훑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간 순은 아니고 위치 순으로 소개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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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부터 메릴랜드, 버지니아, 노스 캐롤라이나, 사우스 캐롤라이나, 그리고 조지아를 일컬어 남부 식민지라고 부릅니다.)

먼저 메릴랜드부터 봅시다. 메릴랜드는 볼티모어 경에 의해 1629년에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버지니아는 영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것과 동시에 영국 국교회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볼티모어 경은 영국과 버지니아에서 쫓겨난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안전한 피난처를 만들기로 하죠.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식민지를 건설한 겁니다. 여기서 자유라 함은 기독교 신앙의 자유, 즉 가톨릭(구교)와 개신교(신교)의 자유를 보장한 것이었고, 무신론자들과 유태인들은 제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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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랜드를 발전시킨 제 2대 볼티모어 경 세실 칼버트입니다. 영국 본토에서 칼버트 가문은 굉장한 부자였고, 미 독립전쟁 이후에 메릴랜드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합니다.)

메릴랜드 역시 담배 농장 산업으로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아직은 노예제가 그리 흥하지는 않았고, 계약 노동자(indentured servants)들이 주된 노동력이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영국의 실패한 농민 및 노동자 신분의 국교회 신자들이었습니다. 그에 반에 볼티모어 경은 그의 가톨릭 친구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고 이들 가톨릭 세력은 메릴랜드의 상류층을 차지하게 됩니다. 가뜩이나 일이 힘들어 죽겠는데, 종교의 차이까지 만연하니 이들 계약노동자들이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시간이 갈수록 수가 늘어나던 신교 세력이 들고 일어날 조짐을 보이자, 볼티모어 경은 거꾸로 소수가 된 구교 신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관용령(Act of Toleration: 종교의 자유를 정치적으로 보장함)‘을 선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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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식민지 초기 노동력의 아주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연한 계약노동자들. 만약 누군가 이들이 대서양을 건너는 배삯을 내준다면, 돈을 대준 그 사람은 7년 동안 자신의 농장에서 이들을 부려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제도들이 존재했지만 모두 가혹하기 짝이 없어서 아홉 명 중에 한 명만이 7년의 기한을 살아남아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 캐롤라이나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캐롤라이나는 당시 영국 국왕 찰스 2세의 이름을 따 건설되었습니다. 로버스 헤스 경이 1663년에 만든 캐롤라이나 식민지는 당시 북미 최대의 항구 찰스타운을 중심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총 여덟 명의 영주(Lord Proprietor)들이 캐롤라이나를 나눠 가졌고, 1729년 이들이 국왕에게 돈을 받고 땅을 팔게 되면서 국왕령(Crown Colony)이 되는 동시에 북과 남으로 쪼개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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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와 조지아 사이에 낑겨 있는 캐롤라이나입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버지니아와 마찬가지로 담배 재배를 주로하는 농장과 플랜테이션들이 많이 들어섰고, 대지주 계급이 생겨났습니다. 그럼 이렇게 고정된 계급이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회 계급은 날이 갈수록 고정되고, 점점 귀족적으로 변해가게 되죠. 이는 1700년 이후 흑인 노예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더욱 더 심화됩니다.

노스 캐롤라이나는 이런 귀족적인 버지니아와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도망쳐 나온 불법거류민들이 만들게 됩니다. 버지니아와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끼어 있는 위치상 불법거류민들이 집중되기 수월했던 겁니다. 이러한 주민 특성 상 굉장히 자유롭고 계급제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남쪽의 조지아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지아는 만들어진 배경이 특이한데요, 이 식민지의 건설은 플로리다의 에스파냐 식민지를 막기위한 방파제 역할이 컸습니다. 캐롤라이나가 만들어지고 나서부터는 에스파냐와 소규모 충돌이 매우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영국 왕 조지 2세에게 나타난 사람은 바로 제임스 오글토프 장군이었습니다. 오글토프는 왕의 허락을 받고 죄수들을 이끌고 1732년 조지아 건설에 착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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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에스파냐령 플로리다 바로 위에 있는 식민지가 조지아입니다. 서쪽에는 뉴프랑스마저 보입니다.)

오글토프 장군은 에스파냐 군에 맞서 싸워 이김과 동시에 조지아 곳곳에 기지를 설치했고, 농장과 면화 생산공장을 설치할 기반을 닦았습니다. 비록 오글토프는 실패했지만, 북미 남부에서의 에스파냐와 원주민 부족들의 세가 약해짐에 따라 조지아 또한 재기하는데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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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글토프가 처음 조지아를 개척할 때 기지들의 모습입니다. 찰스타운에서 출발한 물자를 조달받으며 숲 속을 헤쳐나갔다고 합니다. 조지아는 첫 13식민지 중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식민지입니다.)

이로써 다섯 남부식민지의 소개가 끝났습니다. 이제 북부와 중부식민지 여덟 군데가 남았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식민지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는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의 기숙사들 마냥 각각이 특이한 배경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저와 같은 미국 유학생들은 이 내용을 악착같이 외워야 하지만, 일반 독자 여러분은 그냥 ‘올ㅋㅋ 좀 생소하지만 신기한 내용이구먼?’ 하고 넘어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북쪽으로 올라가봐야 할 것 같네요. 뉴잉글랜드라고도 불리는 북부 식민지들은 총 네 곳, 매사추세츠, 뉴 햄프셔, 코네티컷, 그리고 로드 아일랜드였습니다. 그 중 가장 먼저 건설된 곳은 매사추세츠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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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식민지들의 지도입니다. 오늘날의 메인 주에 해당하는 부분은 보시다시피 당시 매사추세츠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남쪽에서 제임스타운이 막 담배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무렵, 북쪽에서는 한 무리의 종교인들이 대서양을 건너 북미 대륙에 도착했습니다. 바로 청교도 분리주의자들이었죠. 이들은 그 유명한 배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오늘날의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플리머스(Plymouth)에 1620년 도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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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항해를 완수해낸 그 이름도 아름다운 메이플라워 호. 사실 이 배의 항로는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으로 가도록 설정되어 있었지만, 80일 간의 항해 동안 생긴 착오로 인해 북부로 떠 밀려가게 됩니다. 사실 좀 더 음모론적인 관점에서 청교도들이 원래부터 자신들을 탄압하던 국교회 세력이 강한 제임스타운으로 가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북쪽으로 갔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제임스타운과는 달리 플리머스 식민지는 아주 체계적인 시스템을 필두로 한 계획적인 개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미 대서양을 건널 때 배 위에서 일종의 법규인 <메이플라워 협약(Mayflower Compact)>에 서명한 이들 청교도들은 윌리엄 브래드포드와 크리스토퍼 존스 선장의 지도 하에 자신들 만의 식민지를 만들었습니다. 굉장히 엄격한 생활 방식을 강조한 플리머스 식민지는 매사추세츠의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성공적인 성과를 거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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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리더쉽과 확고한 비전으로 청교도들을 이끌었던 윌리엄 브래드포드. 관점에 따라 아이러니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브래드포드는 민주주의를 굉장히 혐오했고, 플리머스 식민지가 강력한 영도자 하에 발전하는 것을 지지했습니다. 브래드포드 자신도 30번 넘게 영도자에 선출되었죠.)

시간이 흘러 1628년에 또다른 20,000명의 청교도 무리가 매사추세츠 만 주식회사(버지니아 주식회사가 제임스타운을 만든 것처럼)의 지원 하에 매사추세츠 만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조금 더 북쪽에 오늘날의 보스턴과 세일럼에 자신들의 식민지를 세우고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Massachusetts Bay Colony)라고 부르죠. 존 윈스럽의 지도 하에 만 식민지는 기독교 윤리에 따른 민주주의인 <성경 커먼웰스(Bible Commonwealth)>를 토대로 성장합니다. 성경 커먼웰스의 특징은 청교도 교회의 일원이 아닌 사람들(가톨릭, 국교회, 루터파 등등)은 투표권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있고, 플리머스의 식민지가 그랬던 것처럼 매우 엄격하고 각박한 청교도 윤리를 강요했다는 것이 있겠습니다. 이는 후에 다른 북부식민지에도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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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만 식민지와 플리머스 식민지의 지도입니다. 주위에 날아갈 듯 써있는 이름들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입니다. 플리머스와 만 식민지는 각각 점점 팽창함에 따라 결국 결합했습니다.)

청교도 식민지의 갑갑한 생활 태도에 반발해서 들고 일어난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로저 윌리엄스였죠. 윌리엄스는 이 폐쇄적인 사회에 대해 비판하는 동시에 영국 왕이 내준 칙령(charter)자체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또한 청교도들이 강제로 원주민들에게서 빼앗은 땅에 대해 식민지 정부가 보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고, 과연 교회가 세속세계를 통제할 권리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비판했습니다. 이 마지막 질문이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거슬렀고, 1635년 로저 윌리엄스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쫓겨나게 됩니다.

로저 윌리엄스는 이에 따라 아예 새로운 식민지인 로드 아일랜드(Rhode Island)를 시작합니다. 로드 아일랜드는 그의 반항적인 성격을 반영하듯 매우 자유롭고 권위도전적인 성향을 독립전쟁이 끝나고 미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유지했죠. 로드 아일랜드의 창설은 매우 기념비적이었는데, 왜냐하면 북부식민지에 청교도가 아닌 다른 종교의 사람들도 모여들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북부의 확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천혜의 항만으로 여겨진 만들을 통해 로드 아일랜드는 새로운 이민자들을 맞이함과 동시에 조선 및 무역으로 번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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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윌리엄스가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강을 건너 오늘날의 프로비던스에 발을 내딛는 장면입니다.)

같은 해, 토마스 후커라는 청교도 목사가 또다른 무리를 이끌고 코네티컷(Connecticut)에 정착했습니다. 북부식민지로서는 드물게 코네티컷 강을 따라 비옥한 농토가 펼쳐져 있었거든요. 1639년에 코네티컷 사람들은 <기본 규칙(Fundamental Orders)>를 제정해 자신들의 법규로 삼았는데, 이는 미국 식민지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성문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최초의 성문법이니 뭐니 하는 게 말도 안되는 게 날짜로만 보면 메이플라워 협약이 먼저였고, 또 제임스타운에 내려진 국왕의 칙령도 먼저였거든요. 공식적으로는 <기본 규칙>이 최초였을지는 모르지만, 미국사가 관점에 따라 뒤죽박죽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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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네티컷 강 주위에 형성된 광활한 농토의 모습입니다. 코네티컷 농장들의 전원적인 문화는 지금도 매우 유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뉴 햄프셔는 가장 북쪽에 위치한 식민지였습니다. 어업과 모피 무역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뉴햄프셔는 원주민들과의 충돌도 거의 없었고, 청교도를 바탕으로 시작했지만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습니다. 뉴 햄프셔는 1641년 매사추세츠에 흡수되었다가 1679년 국왕의 명령으로 다시 독립했습니다.

기후가 습하고 따뜻했던 남부와는 달리 뉴잉글랜드의 척박한 환경은 식민지 거주민들을 계속 괴롭혔습니다. 토양은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운영하기에는 너무나도 비효율적이었고, 강들 또한 너무 좁고 빠르게 흘러 무역 목적으로 제대로 이용하기 힘들었습니다.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북부 식민지는 주위의 차고 넘치는 숲들을 베어 목재를 수출하거나, 그 목재를 이용해 배를 만드는 조선소들을 만들었습니다. 북미 연안을 항해하던 영국 배들은 대부분 매사추세츠의 항만에서 수리를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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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식민지의 항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입니다. 해상 무역이 활발했고, 소규모 상인들이 득세하는 곳이었죠.)

이렇게 버지니아를 제외한 남부식민지 네 군데와 북부식민지 네 군데의 기원과 발전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다음 글에서 아마도 우리에게는 가장 친숙할 중부식민지 네 군데만 짚고 넘어가면 첫 13식민지들의 소개는 끝날 듯하고, 이제 드디어 미 독립전쟁의 직접적인 원인들에 대해서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글이 굉장히 지루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해서는 굉장히 죄송하고 제 필력을 탓하시라고 밖에는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야기이든 재미는 들려주는 사람에게 달려있는 거거든요.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channel.nationalgeographic.com

traditioninaction.org